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은 단순한 미신이나 종교적 광신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도적 권력, 집단 공포, 사회 구조적 불안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14~17세기 사이 수십만 명이 ‘마녀’로 지목되어 고문과 처형을 당했으며, 이 중 대다수는 여성이었다. 당시 교회와 국가 권력은 질병, 기근, 전쟁,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악마와 마녀'에게 돌렸고, 이 과정에서 민중의 불안과 편견이 폭력으로 전환되었다. 본 글에서는 마녀사냥의 역사적 배경, 제도화 과정, 여성 탄압 구조, 그리고 그로 인한 유럽 사회의 균열을 깊이 있게 분석한다.
1. 마녀 개념의 형성과 초기 교회 내 인식
고대 유럽 사회에서도 주술과 요술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행위는 주로 일상적이고 민속적인 문화 속에 통합되어 있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이러한 민속 신앙이 단순히 ‘이교도의 미신’으로 분류되었으며, 그 자체로 큰 탄압의 대상은 아니었다.
■ 성경과 마법 금지
성경에는 ‘마법사와 주술사를 죽이라’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으나, 중세 초기 교회는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성직자들은 마법과 요술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착각’이며, 주술 행위는 무지한 자들의 헛된 믿음이라고 여겼다.
카롤링거 시대의 교회 법령 중 일부는 ‘마녀가 하늘을 날거나 기후를 조작한다는 믿음은 허구’라며 해당 믿음을 벌하고, 실재하는 마녀를 처벌하기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교육해야 한다고 보았다.
■ 중세 중기 이후 악마론의 부상
12세기 이후 스콜라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확산되면서, 악마와 마법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본격화된다. 악마는 물리적 존재이며,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어졌고, 이에 따라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로서 마녀의 존재가 점점 실체화되었다.
마법은 단순한 미신이 아닌 신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교회는 마법과 이단, 마녀 개념을 결합해 이들을 체계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2.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의 제도화 과정
13세기 이후 카톨릭 교회는 정통 교리를 어기는 행위를 '이단'으로 보고 조직적 탄압을 개시했다. 이때부터 마녀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안전과 신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 이단 심문제도의 도입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이단을 색출하기 위한 교황청 특임 기관을 설립했고, 이를 통해 유럽 전역에서 종교 재판이 이루어졌다. 이 재판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심문과 고문이 정당화되었다.
마녀사냥은 이러한 이단 심문제도의 연장선에서 발전했고, 마녀는 ‘사탄과 계약을 맺은 여성’으로 법적 범주 안에 포함되었다.
■ 『마녀 망치(Malleus Maleficarum)』의 영향
1487년 독일의 수도사 하인리히 크라머와 야콥 슈프랭거가 집필한 『마녀 망치』는 마녀사냥을 체계화한 최초의 이론서이자 실무 매뉴얼이다. 이 책은 마녀의 존재를 확고히 주장하며, 마녀의 신체 특징, 행위 유형, 심문 절차, 고문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 책은 단순한 종교서가 아니라, 마녀사냥을 제도화하고 폭력성을 정당화한 결정적 텍스트로 평가받는다. 이후 수세기 동안 수많은 재판관과 성직자가 이 책을 근거로 마녀를 색출하고 처형했다.
■ 고문과 자백의 순환 구조
교회 재판은 증거가 아닌 자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피의자에게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낸 후, 그 자백을 증거로 삼는 구조였다. 이로 인해 결백한 이들도 고통을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게 되었고, 그 자백은 새로운 마녀를 지목하는 도구로 이어졌다.
마을 전체가 의심과 공포에 빠졌고, 이웃, 친구, 가족을 고발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3. 여성혐오, 경제 불안, 집단 공포의 결합
마녀사냥의 핵심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전체 희생자의 약 75~85%가 여성으로, 이들은 대개 독신, 미망인, 나이가 많거나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이들이었다.
■ 여성혐오와 종교 교리
기독교 초기 교리에서는 여성을 ‘이브의 후손’이자 ‘유혹의 근원’으로 묘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자들 또한 여성을 이성보다 감정, 영혼보다 육체에 가까운 존재로 보았으며, 마녀와의 연관성이 강조되었다.
『마녀 망치』에서도 여성은 타고난 결함 때문에 악마에 쉽게 넘어가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이는 중세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에 대한 구조적 불신과 혐오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 경제 불안과 희생양 심리
기후 변화로 인한 흉작, 흑사병 확산, 도시 빈곤 증가 등은 중세 후반 유럽을 혼란에 빠뜨렸다. 민중은 고통의 원인을 눈앞의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했고, 그 대상이 바로 사회적 약자인 마녀였다.
여성 치료사, 산파, 약초사, 외따로 사는 노인 여성들은 쉽게 표적이 되었고, 처형 후 그들의 재산은 지역 권력자나 교회에 귀속되는 일이 많았다.
■ 집단 히스테리와 마녀집회 상상
교회 문서와 설교, 심문 기록 등은 마녀들이 밤마다 집회를 열어 악마에게 경배하고 아이를 희생시킨다는 상상을 퍼뜨렸다. 이는 공포를 더욱 증폭시켰고, 일반 민중이 자발적으로 마녀를 고발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사탄과의 계약’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범죄 혐의가 아닌, 신에 대한 전면적 반역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곧 극단적인 형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결론: 마녀사냥, 공포가 만든 제도적 폭력
마녀사냥은 단순히 종교적 오류나 무지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유럽 사회가 겪고 있던 복합적 위기,정치 불안, 경제 위축, 종교 개혁, 질병 확산속에서 만들어진 제도화된 폭력이었다.
권력은 위기를 해결하는 대신, 약자를 처벌함으로써 통제를 유지하려 했다. 여성은 그 가장 쉬운 희생양이었다. 마녀사냥은 집단 심리와 제도 권력이 어떻게 결합해 인간의 존엄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이제 우리는 마녀사냥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의 혐오와 배제, 조작된 공포에 맞서야 할 지혜를 배워야 한다. 역사 속 희생자들의 고통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인간 존엄성과 진실의 중요성을 기억해야 한다.